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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다
UNFAMILIAR

Jae Chul Jung

2015. 02. 24 - 05. 06

JJ Joong Jung Gallery에서는 2015년 두 번째 전시로 2월 24일(화)부터 3월6일(금)까지 정재철 Jung, Jae-chul 작가의 낯설다 unfamiliar 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정재철 작가가 작업초기부터 끊임없이 탐구해 오던 얼굴에 관한 작업을 사실주의적 재현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자 한다. 작가는 재현을 통한 전달은 결국 주체들의 내면적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재현의 와해가 또 다른 재현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다소 모순적인 상황에서 정재철 작가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한다.

2014년부터 정재철 작가는 기존의 문제의식에서 단 한 가지만을 남겨 놓고 재현을 극단적인 지점으로까지 해체시키고 있다. 승자나 패자, 권력을 가진 자나 피해자들 같은 세계에 대한 거대담론은 이제 더 이상 그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정재철 작가는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이 붙들고자 한 것이 사람들의 얼굴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곁에서 생생하게 살아있고, 관계 맺고,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 말이다. 지인들의 얼굴에 대한 작업은 작가에게 이전과는 다른 고려사항들을 만들어주었는데, 하나는 인물이 지닌 고유한 특징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다. 이러한 요인들은 작가로 하여금 최대한 대상을 보존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는 이러한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암호화시켜 놓았다. 얼굴과의 솔직한 대면은 얼굴을 구성하는 시각적인 계기들이 현 사실적으로 전해주는 자료들이 아니다. 레비나스는 “얼굴 속에서 그 자신을 현시하는 타인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고유한 조형적 본질을 꿰뚫고 나간다”고 말한바 있다. 재현이란 일종의 문법적 규칙이자 이성의 규준들과 같아서 필연적으로 타인의 얼굴을 주어진 방식으로 재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얼굴은 자신의 목소리를 훼손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와 맺고 있는 감정의 깊이 역시 밋밋해지고 만다. 그래서 결국 진정으로 그의 얼굴이 전달하는 의미 전체를 포착하고자 한다면 필연적으로 재현을 넘어서야 하며, 그와의 관계가 지니는 감정의 깊이를 비롯해 말할 수 없지만 말해지고자 하는 것들을 붙잡으려 해야 한다.

작가는 이와 관련해 자신이 얼굴에서 남겨놓고 싶은 유일한 것은 표정이며, 표정을 해석할 모든 권리를 관찰자에게 넘겨주고 싶다고 말한다. 이렇게 최대한 해석을 열어놓기 위해, 작업에 대해서 솔직해지기 위해, 그는 형태를 최소한의 단위들로 분해하고 뒤틀고 붕괴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화면 가득 분산된 형태들을 그나마 붙들고 있는 것은 서로 경쟁하듯 맞부딪치고 교전하고 질주하는 강렬한 색채들과 그것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물감 덩어리들이다. 카오스와도 같은 이 느슨한 성좌들은 그것들이 자리한 공간이 밀어붙이는 또 다른 색채의 압도 속에서 언제든지 흩어질지 모르는 불안정한 배열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격렬한 선들의 분투와 색채의 폐허 속에서, 이 세계의 압도적인 붕괴 속에, 얼굴들은 오직 찰나적으로만 들려오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정재철 작가는 눈먼 자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손길처럼 이제 마지막으로 얼굴이 전해주는 어떤 목소리를 붙들고 있다. 세상을 비춰내는 거울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으로 남아있는 이 마지막 목소리에 대한 애정과 탐색이 그를 지탱하게 해주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를 희망한다.
- 이은정 비평 중


내가 나한테 하는 말...... 최근의 작품은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이전 작품은 사회문제에서 어두운 소재를 선택해 메시지를 전달 하고자 했다면, 이제는 그림이 나에게 되묻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 주위 사람들 중 나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을 선택한 후부터 철저히 이성을 배제 시키고 대상에 대한 솔직한 감정만을 추출하기 시작한다. 대상과의 사건과 대화를 되짚다 보면 어느 새 마치 거울을 앞에서 말하듯이 그림과 대화를 하고 있더라.
내가? 정말? 너를? 왜? 애써 숨겨왔던 혹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상에 대한 복잡 다양한 감정들이 캔버스 위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누구를 그린 것 인가?’ 는 중요하진 않다. 작품의 대상은 모두 다른 인물들이다. 즉, 같은 감정으로 표현한 작품은 없다. 작품 속 인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가령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그렸다고 해서 예쁘고 웃는 얼굴로 표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몰라주고, 나 혼자 가슴앓이 하고 있는 상태라면 결코 예쁘게 표현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각자 나름의 몇 가지 부류를 나누어 놓고, 목적에 끼워 맞추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과 수단이 다양해진 것이지 오히려 단순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이 내 작품 속에서 다양한 표정을 보길 희망해 본다. 대상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 하였는데도 한 두 가지의 표정만 보인다면, 나조차도 내 주위의 사람들과 획일화된 단순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 작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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