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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πόροι 는 통로를 뜻한다. 다만 이 말이 본래 가리킨 것은 벽으로 둘러싸인 복도가 아니라 건너가는 자리였다. 강을 가로지르는 얕은 여울, 배가 지나는 바닷길, 두 뭍 사이에 트여 있는 물목이 모두 πόρος 였다. 사방이 열려 있고 어느 쪽으로도 이어지는 자리, 그러니까 무언가가 지나갈 수 있게 된 상태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기원전 5세기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우리가 세계를 감각하는 일을 설명하면서 이 말을 끌어왔다고 전해진다. 그가 그린 그림에 따르면 사물은 쉬지 않고 무언가를 흘려보내고 있고, 우리 감각기관의 표면에는 그것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가 나 있다. 흘러나온 것과 통로가 서로 맞을 때에만 감각은 일어나며, 크기가 어긋난 것은 그 통로를 그저 스쳐 지나간다. 세계는 언제나 우리 쪽으로 흘러오고 있지만 나에게 도착하는 것은 내 통로의 모양에 들어맞는 것뿐이라는 이야기다.
감각과 지각이 갈라지는 곳이 여기다. 감각은 빛이 눈에 닿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며, 그 자체로는 아직 무엇도 아니어서 우리가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 닿음이 몸이 서 있는 자리와 지나온 시간, 이전에 본 것들과 엮이면서 비로소 무엇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는 그것을 지각이라 부른다. 둘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통로가 길이를 갖듯 그 간격에는 시간이 걸린다.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하는 순간은 언제나 빛이 도착한 순간보다 조금 뒤에 있으며,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은 그 짧은 지연을 건너온 뒤에야 우리 안에서 성립한다.
김선희는 오래도록 빛을 대상이자 재료로 다루어 왔다. 달빛이 햇빛으로 바뀌는 시점의 허공을 올려다보고, 작업실 창을 넘어 들어온 무지개를 한지와 아크릴 판에 받아 보고, 벽에 드리워진 햇살의 모양과 각도가 시간에 따라 길어지고 짧아지는 것을 표시해 온 오랜 관찰이 작업의 바탕에 깔려 있다. 지난해 이곳에서 열린 아카이브 개인전 ⟪All the Light We Cannot See⟫가 완성된 작품 뒤에 남는 그 과정 자체를 전시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올 봄 상업화랑에서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빛이 지금에 도달하기까지의 시간을 공간에 펼쳐 보이며 우리가 현재라 부르는 것이 실은 빛이 건너온 거리만큼의 과거일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이번 전시는 그 시간을 몸 쪽으로 옮겨 온다. 《πόροι (Poroi) | 지각의 통로》가 다루는 것은 빛이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이 아니라, 도착한 빛이 내 안에서 하나의 경험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함께 놓인 구작 세 점의 제목은 〈Light Rains (산란)〉, 〈Light Conveys (반사)〉, 〈Light Presents (투과)〉다. 빛이 무엇을 하는가를 그대로 이름으로 삼은 것들이다. 반면 신작 여섯 점의 제목은 모두 전치사를 품고 있다. ‘사이, 의, 에, 가로, 으로, 너머’는 무언가를 지시하는 대신 무엇과 무엇이 어떤 관계로 놓여 있는지를 말한다. 현상이 복수인데 공간이 단수인 것도 같은 사정에서 나온다. 하나의 공간을 두고 빛이 어느 쪽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현상이 발생하며, 작가는 그 관계와 방향을 그대로 작품의 이름으로 삼았다. 현상에 붙이던 이름이 관계에 붙는 이름으로 옮겨 온 셈인데, 그렇다고 광학이 물러난 것은 아니다. 여섯 점에는 반사와 굴절, 파동, 분광, 명암의 경계, 투과가 하나씩 배당되어 있다. 이 낱말들은 물리 교과서의 용어이면서 동시에 무언가가 나에게 도착하는 서로 다른 경로의 이름이다.
전치사들은 또한 점점 멀리 나아간다. 〈Phenomena Between Spaces (공간, 사이)〉에서 빛은 한 뼘 남짓한 케이스 안, 마주 본 두 거울 면 사이를 오가는 데서 그친다. 〈Phenomena of Space (공간, 의)〉에 이르면 그 왕복은 키를 훨씬 넘는 높이로 올라서고, 접혀 있던 거울 면이 전동으로 다 펼쳐지면 가운데 선 사람을 양옆으로 몇 겹씩 에워싼다. 빛이 눈앞에 놓인 무엇이기를 그치고 사람이 그 안쪽으로 들어서는 첫 자리다. 〈Phenomena Over Space (공간, 에)〉에서 빛은 수면 위로 퍼지고 나아가 반사된 윤슬이 벽에 아른거리며, 〈Phenomena Across Space (공간, 가로)〉의 색광은 오후 내내 전시장을 가로질러 이동한다. 〈Phenomena Through Space (공간, 으로)〉의 빛은 벽과 경계를 다시 그어 공간의 구획 자체를 바꾸며, 마지막 〈Phenomena Beyond Space (공간, 너머)〉에서 빛의 경로는 주 출입구에서 시작해 안쪽 벽까지 건물 전체를 관통하고, 그 경로 위에 선 사람의 몸에도 색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섯 점을 차례로 놓으면 빛이 닿는 범위가 케이스 안에서 몸을 지나 공간 바깥으로 계속 밀려 나가며, 그 배열 자체가 하나의 통로를 이룬다.
이 작업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관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여섯 점의 전치사를 거울 케이스 안에서 출입구로 늘어놓으면 그 배열 자체가 하나의 통로를 이루지만, 관객은 그 통로를 가장 넓은 지점에서부터 거슬러 들어간다. 시작이 곧 가장 먼 곳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빛이 오가는 거리는 좁아진다. 한 곳에서 출발해 한 곳으로 도착하는 복도라면 있을 수 없는 순서다.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도 작업마다 다르다. 모터와 액추에이터가 정해진 주기로 거울을 여닫는가 하면, 대기의 기류와 관객이 던진 구슬이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고, 어떤 작업에서는 태양의 고도가 시간을 결정한다. 〈Phenomena Between Spaces (공간, 사이)〉는 책처럼 열리고 닫히는 양면 구조다. 면이 서서히 열리면 하나의 상은 여러 층위로 분화되고, 닫히면 다시 하나로 압축된다. 〈Phenomena of Space (공간, 의)〉에서 그 분화와 압축은 수렴과 발산이 되어, 안으로 들어온 것은 기억으로 기록되고 바깥으로 흩어진 것은 또 다른 감각을 일으킨다. 〈Phenomena Over Space (공간, 에)〉에 이르면 빛은 얕은 수면 위로 올라선다. 인류가 가장 먼저 들여다본 거울이었던 물의 표면 위에서 실재하는 형상과 반영된 형상이 겹치고, 기류를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던 금속 링이 멈추면 관객이 구슬을 던져 다시 파동을 일으킨다. 소리가 링을 움직이고 링이 빛과 그림자를 바꾸는 이 연쇄 속에서 관객은 현상의 관찰자가 아니라 그것을 발생시키는 사람이 된다.
〈Phenomena Across Space (공간, 가로)〉는 서향 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자연광에 기댄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는 특정 시간대에만 직사광이 레인보우 필름을 만나 여러 색으로 갈라지고, 그 색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시장을 가로질러 이동하다 사라진다. 전시가 9월에서 10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동안 태양의 위치는 계속 달라지므로, 이 작업은 매일 조금씩 다른 자리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언제 오는가에 따라 다른 것을 보게 되고, 어떤 시간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눈앞에 이미 도달해 있었으나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빛의 층위가 있다는 이 작업의 전제는, 전시장에 머무는 시간 자체를 통해 관객에게 되돌아온다.
〈Phenomena Through Space (공간, 으로)〉는 빛이 공간을 다시 쓰는 방식을 보여준다. 어두운 코너를 비추는 광원은 창과 같은 하나의 면을 통해 나타나고, 빛과 어둠의 경계가 옮겨 갈 때마다 같은 물리적 공간이 다른 거리와 다른 시간의 감각으로 지각된다. 여기서 창은 바깥을 내다보는 개구부가 아니라 감각과 지각이 드나드는 통로 그 자체다. 우리는 빛이 만들어 낸 경계를 실제 공간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안과 밖, 앞과 뒤를 구분하지만, 밝기와 색온도가 달라지면 같은 자리가 다른 공간으로 지각된다. 통로는 건물에 뚫려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지나가면서 그때그때 열리는 셈이다.
빛은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쉽게 지나쳐지는 현상이다. 《πόροι (Poroi) | 지각의 통로》는 그 익숙함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보았다고 믿는지, 그 믿음이 어떤 통로를 거쳐 만들어지는지를 묻는다. 제목이 복수형인 것은 그래서다. 이 전시가 상정하는 통로는 한 곳으로만 이어지는 복도가 아니라 사방으로 트여 어디로든 이어지는 자리에 가깝고, 관객은 그중 자신의 것을 따라 걸으며 익숙했던 세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마주하게 된다.
전시 서문 | 최재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