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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그리다. 피다. 날리다. 

한 동안 제주도의 돌을 그리던 최준근의 작업이 바뀌었다. 매화다. 그러나 그냥 매화가 아니다. 그는 문화적 코드가 분명한 매화를 해체해 전통적인 개념들과 표현 방식 전체를 바꾼다. 붓이 아니라 0.1밀리미터 촉을 가진 가느다란 펜으로 꽃잎을 일일이 그리고, 줄기와 가지들을 먹으로 추상화 하거나 그냥 보통 나무로 환원 시킨다. 그 매화들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이 쓰던 것처럼 두껍고 물질감 강한 캔버스로 끌려와 낙서와 드로잉과 디자인 사이에 자리 잡는다. 그는 그리는 것을 즐기면서도 매화에 대한 고정 관념을 로우 킥으로 연달아 차는 듯이 보인다. 무슨 생각으로 매화를 그렸는지 그가 쓴 작업에 대한 메모를 읽는다. 

옛 그림책을 뒤적이다 보니 작은 그림 한점에 마음이 간다. 봄이 오고 감을 애써 외면해 보려는 듯 무심해 보이는 흰점을 툭툭 찍은 매화 그림은 문득 나에게 창밖을 내다보며 알 수 없는 상념에 잠기게 한다.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아온 매화는 사람을 그윽하게 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꽃이며 속세에 물들지 않는 고결한 선비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그리고 길고추운 겨울이 채지나기 전에 마르고 비틀린 가지에서 돋아나던 그 꽃봉오리는 어쩌면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의 기나긴 기다림의 애절함이 묻어났던 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매화는 더 이상 선비정신을 상징하거나 고결한 정신세계를 논하는 꽃은 아닌듯하다. 기다림이나 애절함이 배어나지도 않는다. 이제 매화는 이른 봄을 만끽하려는 상춘객들의 주변을 나르다 밟혀 사라진다. 그 뿐만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꽃들이 계절도 모른 채 어떤 의미를 되새겨 보기도전에 아무렇게나 사용되다 일회용 휴지처럼 또는 자투리 메모지에 찍찍대던 낙서들처럼 그 꽃들이 버려진다. 나는 왜 매화를 그리고 싶었을까. 매화의 고결한 이미지를 탐하였던 것일까. 그저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적 취향인 것일까. 바람에 날리던 여린 매화 꽃잎들이공책 한 귀퉁이에 끄적대던 그 낙서들과 왠지 많이 닮아 보였다. 

명료하다. 자신이 뭘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뭐 덧붙일 말이 있을까? 선비정신과 암향(暗香)이 부동(浮動)터라는 과거의 매화는 없고, 지금의 매화는 구경거리로 소비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매화 그림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이 아이러니를 그는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아니 낙서한다. 낙서가 그림이고 드로잉이다. 아마도 그가 매화를 그리고 싶었던 이유가 거기 있었을 것이다. 전통적인 매화 그림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면서 동시에 현재의 매화가 가진 위상을 너무 무겁지 않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매화가 더 이상 조선 시대 화가들이 그렸던 매화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오늘날의 매화는 관광 코드에 맞춰 소비되고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 그려진 전기(田琦)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같은 그림은 매력적이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는 싶은데 예전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매화의 세속화인 것이다. 그는 그려봐야 옛날 같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는 것과, 그래도 그리고 싶은 욕망과 갈등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풀어놓는다. 그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캔버스의 바탕은 정성스레 다듬어 차갑게 하고, 드로잉은 상대적으로 자유스럽게 한다. 그의 매화가 흥미로운 이유가 그 때문이다. 즉 차가운 완결성을 가진 물질과 자유로운 세속성이 만나는 장소로서 캔버스를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전통적인 매화를 그리는 법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냥 꽃들이 피어난다. 꽃들이 피고 또 피어 그림을 이룬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꽃이 라기 보다는 선들의 집합이다. 과연 그 선으로 이루어진 꽃들은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가게 될까? 아마도 그린 사람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은 바로 그 때문에 그려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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