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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JJ Joong Jung Gallery에서는 5월 13일(수)부터 6월 3일(수)까지 ‘비우다 채우다’ 전을 가진다. 김승영, 김학수, 최영욱, 최준근 작가의 전시다. 혼돈의 시기에 조용하고 비여있는 듯 하지만 울림을 주는 작품들이다. 비워냄으로써 채워지는 역설 속에서 여백과 여운에서 존재를 탐구하고 근원적 가치와 대화하는 김승영 작가, 우리의 자연과 정신을 닮은 흰 그릇을 만드는 김학수 작가, 소박하지만 극도로 세련된 달항아리를 통해 절제의 미와 물질보다 정신의 힘을 강조하는 최영욱 작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연의 본성에 이르려는 자연미와 여백의 미를 보여주는 최준근 작가의 작품을 통해 텅 비었으되 가득히 충만함으로 요약되는 한국 현대미술의 문화적 깊이를 드러내고자 한다. 

김승영 작가는 소통(communication)과 기억(memory) 이라는 테마를 설치(Installation)나 현장특별작업(site specific work)으로 연출해왔다. 
숲에서 거두어 온 무수한 낙엽들로 전시장을 메우고 그 한가운데에 일정한 속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연출하는 전시공간. 작가개인의 삶을 공유하거나 스쳐간 인명들이 자막으로 흘러가는 영상…… 
그의 작품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찰나적 만남과 기다림, 망각과 기억 속에 위치한 살아있는 존재들의 의미를 생생하게 연출한다. 과거와 현재,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고정 관념화 된 경계를 허물고 時ㆍ空間의 접점과 미끄러짐 사이에서 눈과 귀와 촉각과 후각의 감응기재가 온전히 작동하여 세계와 만나게 되는 희열을 관객에게 제공한다. 그의 작품에 초대받은 관객은 물질과 물질의 찰나적 만남과 기다림, 미끄러짐 사이의 여백과 여운에서 존재들의 내밀하고 근원적 가치들과 대화하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어떻게 세계를 바라볼 것인가를 제시하는 미술의 지표를 넘어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일상의 문맥에서 벗어나 예술의 차원으로 진입하는지, 또 그 예술이 우리의 삶에 있어 어떠한 기능과 가치로 작동하는지를 자명하게 드러내 준다. 

일상의 상품이나 사물을 미술담론(discourse)의 장(field)에 들여와 본래의 문맥을 비틀거나 잘라내어, 현대미술의 계보를 형성해 온 것은 다다이스트와 쉬르리얼리스트, 팝아티스트 들 사이에서 흔하게 채용되어 온 기법이다. 그들의 작업에 관류되고 있는 수법은 일상의 관용화 된 산물들-당대의 신지식과 신기술에 의한 산업사회의 레디메이드-을 담론의 미디어로 차용하여 죠크나 냉소적 패러디를 부가하는 지극히 인위적인 충격효과를 발신하는데 목표를 맞추고 있다. 그것은 서구의 이성중심적 가치관에 기초한 미술담론의 장에서 형성된 진보주의 미술사관의 성과들이었다. 

그러나 김승영의 일상으로부터의 변용과 새로운 차원의 연출효과는 그것들과 부분적으로는 세계를 공유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지평을 달리한다. 그의 작업은 소비 산업자본주의 산물을 차용하더라도 그 산업사회의 일상적 표피나 관용구만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에서 차용된 일상은 도시생활에서의 일상을 빌려오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일탈하고자 찾아 간 고즈넉한 산사에서나 문득 발견하게 되는 생명의 비의(秘意)와 문화적 자취들을 불러 들인다. 바위틈새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름 모를 초목들이나 풀벌레들의 존재에서 발견하는 신선한 생명의 존엄성과 존재의 불가사의, 유적들의 잔허(殘墟)가 환기 시켜주는 인간 삶의 자취나 문화적 기억들의 무게와 의미들을 소생시켜 주는 것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의 명징함과 처마 끝 풍경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려준다. 거기에는 도시의 바쁜 일상과 기계소음 속에 잊혀지고 소모되고 희미해져 가는 우리의 지각기재들- 우리의 눈과, 귀와 촉각과 후각- 을 다시 건강하게 소생시켜주는 마술이 펼쳐지고 있다. 그것은 시각적 진실이나 미술이란 존재의 물질적 규명에만 몰두하던 근대미술담론이나, 온전한 감각기재의 균형을 되살려줄 것으로 기대했던 마샬ㆍ맥루언 식의 전자기술시대에 안이하게 편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승영의 작품세계에는 문명과 자연, 이성과 감성, 이지와 지각세계가 분별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존재의 이법과 지혜에 눈뜨게 하는 현자의 메타포가 빛나고 있다. 
김학수 작가는 오랫동안 연가(煙家:굴뚝 위에 장식으로 얹은, 기와로 만든 지붕 모양의 물건)와 솟대(마을 수호신 및 경계의 상징으로 마을 입구에 세운 장대) 작업을 했다. 이런 기물들은 우리의 자연과 마음을 많이 닮아 있는 기물들로서, 실용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선조들의 지혜와 배려심이 담겨 있다. 오늘날에도 그런 소박하고 일상적인 기물에 담긴 선조들을 미의식과 정신을 발견하며 감탄하게 된다. 연기가 나가는 굴뚝에 집을 만들어 사라지는 연기에 조차 뜻을 부여하던 선조들의 마음, 솟대를 세운 우주와 통하고 싶어 하던 그 마음을 이어받고 싶다고 한다. 이런 작가로서의 바람은 연가나 솟대를 제작할 때에 국한돼 있지 않다. 그의 전반적인 흙 작업은 모두 이런 마음의 표현이라고 한다. 이 땅, 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저 하늘, 우주와 꿈을 향하는 마음을 흙에 담고 싶어 한다. 

“ 이번 작품 역시 그런 마음의 연장으로 우주와 하늘을 작품에 담고 싶었다. 또한 도자기의 쓰임과 놓임을 많이 고민한 작업이다. 굽(그릇 밑바닥에 붙은 나지막한 받침)을 좁게 하여 우리가 사는 땅과 세상을 표현했고, 전(그릇 위쪽 가장자리)을 넓게 하여 하늘 또는 우주를 표현했다.” 

“ 작품에 세로로 낸 줄의 문양으로 연가의 연기처럼 사라져가는 별똥별을 표현했다. 연기가 눈앞에서 사라지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 별똥별 또한 변하여 흩어지질 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져서 볼 수 없어지는 것들은 안타깝고 그리우며 사랑스럽다. 그러나 이 땅 위에 변하지 않을 듯 견고한 그 무엇도 결국은 연기 같고 별똥별과 같은 것임을, 우리는 잊고 있을 뿐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바라보고, 담아본다. 이 그릇에도 무엇이든 담고 싶은 것을 담을 수 있다. 그리고 비울 수 있다. 나는 이 그릇들을 ‘흰 그릇’이라고 부르고 싶다.” 
작가노트 中 

 

 

최영욱 작가는 조선의 달항아리를 그리고 있다. 최영욱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대부분의 한국 단색화(Dansaekhwa)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일종의 수행과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캔버스에 유백색 혹은 다양한 뉘앙스의 흰색으로 여러 번에 걸쳐 바탕을 칠하고, 그렇게 조성된 바탕 위에 약간 도드라지게 달항아리의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안에 무수한 실선을 그어 빙열을 표현하는 그 지난한 행위를 해명할 방법이 없다. 그의 작화 행위는 구도의 몸짓이면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해방의 몸부림이다. 
최영욱의 작품 제목이 란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말의 ‘연(緣)’, 혹은 불교식으로 말해 ‘업(業)’을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인간의 생에 대한 비유이다. 인간과 인간 간의 실타래처럼 얽인 인연이 업을 낳고 그 업이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것이 불교식 연기설의 골자이다. 최영욱이 달항아리의 표면에 숱한 균열을 가는 실선으로 연결시키는 행위의 이면에는 이러한 연기설이 자리 잡고 있다. 
인생의 한 축도로서의 달항아리의 빙열은 그러나 그 자체 미학적 완상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에 최영욱의 달항아리 그림이 지닌 매력과 중의성이 있다. 그것은 한국의 전통적인 미감을 듬뿍 머금고 있는 동시에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한 느낌은 주로 색감이나 소재, 형태에서 온다. 한국의 전통 달항아리에 구현된 아취 있는 빛깔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유백색에서부터 은은한 흰색 또는 다양한 회색이나 검정에 이르는-은 조선시대 도공들이 이루어낸 땀과 노력의 결정체이다. 최영욱은 한편으로는 그러한 전통에 한 발을 담그고 한 발로는 회화를 매개로 이를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 최영욱의 달항아리 그림은 보다 평면적이 되면서 ‘미니멀’해지고 있다. 불룩한 달항아리의 존재감이 밋밋해지면서 평평한 느낌이 가일층 강조되기에 이른다. 그와 동시에 균열을 암시하는 실선들이 달항아리의 전면에 번져나가면서 그와 비례해 달항아리의 형태감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그러한 도정은 매우 미세한 변화지만 어떤 극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필경 어떤 0도의 지점에 도달할 터인데 그 시기가 언제일는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이제까지 그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느리게, 그러나 크고 작은 삶의 단면들이 타인의 그것과 얽혀 인연의 실타래를 엮었듯이, 그의 그림 또한 그것의 한 유비(analogy)로서 균열의 망을 점진적으로 엷게 키워가고 있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영도(零度)의 지점을 향한 끝없는 여행으로서 말이다 
윤진섭 평론 中 

 

“그 달항아리 안에 일일이 선을 그었는데 그건 도자기의 빙열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만났다 헤어지고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우리의 인생길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내 그림의 제목은 ‘Karma’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의도한 데로만 가지 않고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운명, 업, 연(緣)을 선으로 표현했다. 그 선을 긋는 지루하고 긴 시간들이 나의 연을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내 그림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떠 올리고 그 자신 속에 얽혀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를(소통) 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이다. 도자기의 빙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갈라지면서 이어지고, 끊겼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는 선처럼 우리의 인생도 만났다 헤어지고 비슷한 듯 하며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진다.” 
작가노트 中 

최준근 작가는 돌을 그린다. 그가 그린 돌은 검다. 제주도의 검은 현무암 파편이기 때문이다. 그 돌들은 제주도 바닷가에 있고, 그가 그린 그림은 그 돌들이 있는 풍경이다. 흰색 화면 전체는 사실은 바다이자, 흰색이자, 하늘이다. 화면은 모든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 안에 검은 돌들은 징검다리처럼 이어진다. 그리고 한 점의 그림 속에 그려진 돌들의 풍경은 다음 그림으로 건너간다. 
최준근의 풍경은 크고 작은 여러 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은 커다란 한 장의 그림이다. 그림 전체는 연결되어 하나의 풍경, 제주 해안의 풍경을 이룬다. 아니다. 사실 그 풍경은 제주 해안의 풍경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혹은 작가의 마음속의 풍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내부의 풍경이다. 과연 그럴까? 아무래도 좋다. 그 풍경은 결국 보는 자, 관람자의 풍경이 되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 누구의 풍경도 아니면서 또한 동시에 모두의 풍경이기도 하다. 
검은 돌들은 먹으로 그려진다. 최준근은 큰 붓이 아니라 작은 붓들을 쓴다. 한 번 칠하고 두 번 바르고 자꾸 붓질을 쌓아 돌들을 그린다. 아니 그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도록 지시한다. 지시 받은 돌들은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을 이루는 것은 흰색 배경과 검은색의 단단한 돌. 
최준근의 그림은 그림의 대상인 사물의 존재를 지우면서 동시에 존재하도록 허용한다. 이 모순 속의 돌들은 돌이 아니고 검은 색이다. 배경 역시 하늘도 바다도 아닌 흰색일 뿐이다. 그러면서 검은 색은 돌이 되고, 흰색은 돌의 배경이 된다. 이 두 가지 무채색 사이에 그의 그림이 있다. 사실 그의 과거의 그림들에 비하면 놀랍도록 명료하고 단순해졌다. 이 단순함이 시간의 힘이고 그의 힘이다. 
최준근의 그림의 배경이 되는 캔버스는 흰색 배경 이상의 역할과 기능을 한다. 그는 그것을 바다라고 부른다. 그 부름 때문에 흰색은 바다가 되지만 사실은 그것이 바다인지 하늘인지 캔버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그 물결 없는 바다, 수평선 없는 바다, 그려지지 않은 바다는 여백이자 캔버스 자체이다. 이는 동양 그림에서 말하는 여백과도 다르다. 여백은 뭔가 그려지고 난 뒤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개념적 공간이지만 최준근의 그것은 그런 가능성의 공간이나 보는 사람이 상상력을 펼치는 공간 이상의 어떤 것이다. 거기에는 존재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캔버스의 존재감은 어쩌면 그려진 대상인 돌보다도 강하다. 

그의 그림을 보면 처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려진 돌들의 존재감 보다는 캔버스 전체의 프레임이다. 옆으로 긴 장방형 틀 안에 놓인 돌들은 그 다음에 눈에 띈다. 그림이 걸린 공간과 흰 사각형 프레임 사이의 존재론적 긴장감이 그의 그림을 보는 열쇠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은 아슬아슬하다. 즉 모던한 추상회화가 갖는 평면적인 특질들과 구상적인 드로잉과 같은 재현적 묘사 사이에 다리처럼 걸려 있다. 그것이 그의 그림이 보는 이의 눈길을 잡아 끄는 힘이다. 그의 그림은 여차하면 디자인적이 될 위험과 최소한의 묘사로 이루어진 미니멀적 재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절제이다. 때문에 그의 작업들 중 성공적인 것들은 팽팽하게 균형이 잡힌 바둑판처럼 긴장이 흐른다. 돌들은 귀와 변에 알맞게 놓여 세력과 집 사이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마치 고수들의 초반 포석처럼 보인다. 한 수가 더 놓이면 균형이 무너지고, 다시 한 수가 놓이면 또 균형이 맞아가는 기나긴 대국. 그러므로 최준근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그려진 돌을 보는 것이 아니다. 
걷기와 바라봄의 차분한 결과물인 최준근의 그림들은 단순하다. 그 단순함은 돌의 침묵이나 바닷물의 일렁임과도 같다. 멀리서 보면 점들로 보이는 그의 그림은 가까이 가보면 돌이 된다. 그가 그린 돌들은 먹으로 그의 획들의 집적이다. 물론 서예의 그것처럼 획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획들이 쌓여 이루는 돌들은 묘사된다기 보다는 쓰여진다. 그리기가 아닌 쓰기로서의 이미지 제작은 재현으로부터 사실은 멀어진다. 그의 그림은 재현이 아니면서 재현의 효과를 내고, 엄밀하게 구성되었으면서 구성으로부터 멀어진다. 
동양의 옆으로 펼쳐진 두루마리 그림들은 하나의 고정된 시점에서 그려지지 않는다. 잘 알다시피 그런 그림들은 산점 투시, 혹은 걸으면서 바라본 것처럼 그려지고 같은 방법으로 보여진다.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올 필요 없이 부분들을 보아서 상상력으로 재구성하는 그림들. 
최준근의 돌 그림, 돌의 풍경은 한 곳에서 바라보는 서양 전통 회화의 구성과 방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걸으면서 보아야 한다. 실제로 걷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그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끝없이 제주 바닷가를 걷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보는 사람들 또한 그림 속을 걷기를 권한다. 느릿하고 천천히.... 

강홍구 평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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